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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7. <요재공>이로재기(履露齋記)
1. 문헌 목록 〉19. 19世 〉9. <요재공>석현배효열부숙부인남양홍씨기적비명(奭炫配孝烈婦淑夫人南陽洪氏紀蹟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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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요재공>석현배남양홍씨부인행록(奭炫配南陽洪氏夫人行錄)
(요재공후)19世석현(奭炫)配 남양홍씨부인행록(南陽洪氏夫人行錄) 惟我王大夫南陽洪氏文正公諱彦博后處士諱廷燮女 純廟十月二十六日生天姿粹敏性行端正孝父母友兄弟平居不戯笑夜行以燭年十八歸于吾家尊舅己沒尊姑在堂而家貧無賴然夫人少無難色孝養備至累年臥褥不出户庭湯藥必甞進糞穢必躬除且君子嬰疾累月不起晝夜深憂百方冶療不見其效忽夢見老媼曰疾今至此何其眼深耶雉用有差云驚而视之時夜三更雪深三尺内銳意家後麓未幾歩有雉伏于松下得還供用疾乃快巫既而當丙寅洋擾君子以公事方在完城聞京師之敗憤懣成疾而還夫人朝則望京華祝乘勝夜則禱北辰以願伐終無所感奄然下世夫人哀痛罔極失以下從幡然改悟以盡喪葬之禮又盡孝事姑撫育四男年至壯大或勸富婚嚴而拒之曰婚者地醜德齊可也吾早喪君子又無所敎且貧富懸殊於義不當竟擇其可者而婚娶焉其訓家五篇皆至誠惻怛之語而男勤乎學婦勤乎織若是數十年家道點成田地頗廣當丙子大荒謂諸子曰如此凶歲獨爲衣食無異禽獸先自族戚以至鄉隣不計親疎分施周恤於是鄉黨莫不稱頌聞于官本倅金公胤鉉擧孝烈而加賞按使李公冕相饋以酒肉特除烟役久之又當庚戌無國之日彼輩以優老例饋酒肉乃奮然技器曰寧死豈受夷虜之饋乎其使亦赧然而去丁巳三月十一日卒壽八十七窆考位同焉嗚呼我祖妣之孝之烈自有鄉評在小子何敢贅述見其事親則累年侍陽甞藥甞糞志體俱養事君子則初而獲雉見效終而祈斗願代可謂無愧古之賢媛若其訓子之則却饋之義可謂傳家龜鑑而顧今世級日降人獸無別上無有司之褒下無記實之文伊後子孫雖欲考吾祖妣事行其可得乎是以不揆價越畧述家庭聞見之梗概以俟世之作者焉 不肖孫 斗鉉 記 (요재공후)19世석현(奭炫)配 남양홍씨부인행록(南陽洪氏夫人行錄) 오직 우리 왕대부인 홍 씨는 문정공 휘 언박(彥博)의 후손처사 휘 정섭(廷燮)의 따님인데 순조 十월 二十六일에 출생하여 하늘에서 타고난 자질이 청수하고 영민하며 성품과 행실이 단정하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우애하며 평소에 희롱과 우숨을 아니하고 밤에 촛불을 잡고 다니었다. 十八세에 우리 집에 우귀하였는데 시아버지는 이미 별세하고 시어머니가 당에 계셔 집이 가난하야 힘입을 데 없으나 조금도 어려운 빛이 없이 효도하고 봉양함이 지극하였으며 여러 해 동안 누워계셔 호정에 나오지 않고 약을 다리면 반드시 맛을 보고 드리며 똥과 더러운 것은 반드시 몸소 소제하였다. 또 군자가 병을 알아 여러 달을 일어나지 못하니 밤낮으로 깊이 근심하고 百방으로 치료해도 그 효험을 보지 못하더니 문듯 꿈에 늙은 할미가 나타나 가로되 병이 침중한데 어찌 그리 잠을 깊이 자는가. 꿩을 쓰면 차도가 있을 것이다. 놀래 깨어 보니 그때에 밤은 三경이요 눈이 석자나 쌓였는지라. 이에 마음을 가다듬고 집 뒤 산기슭을 몇 걸음 안 가서 꿩이 소나무 아래 없었는지라 잡아 가지고 돌아와서 달여 드리니 병이 이에 쾌차하였다. 이윽고 병인(丙寅)년 양요를 당하여 군자가 공사로써 왕성에 있으며 경사의 패보를 듣고 울분으로 병이 나서 돌아오니 부인이 아침에는 서울을 바래며 승전을 빌고 밤이면 북두에 빌어대리 죽기를 원하나 마침내 감동한 바 없이 문듯 세상을 떠나니 부인이 애통망극하여 따라서 죽기로 맹서하다가 돌이켜 깨닫고 써 초상장사의 예를 다하며 또 시모를 효도로 섬기고 네 아들을 어루만져 길러 장성하매 혹 부자혼인을 권하니 엄하게 거절하며 가로되 혼인은 처지가 같고 덕이 가주런해야 가하니라. 내가 일찍 군사를 사별하야 가르친 것이 없고 또 빈부가 다르니 의리에 당치 않다 하고 마침내 그가 한자를 가려 혼취하였다. 그 가훈 五편이다 지성칙탄의 말이고 남자는 학문을 부지런히 하며 여자는 방직을 힘써 하니 이와 같이 한 수십 년에 가산이 점점 풍요하고 전지가 자못 널운데 병자년 대흉년을 맞아 모든 아들 달려 일러 가로되 이와 같은 흉년에 홀로 먹고 입는 것은 금수나 다름이 없으니 먼저 족척으로부터 향인에 이르기까지 친불친을 가리지 않고 나누어 주고 두루 구제하니 향당이 칭송 아니 한 자 없으며 관청에 들여 군수김공 윤현(胤鉉) 이효열을 들어 상을 더하고 안찰사 이공 면상(冕相)이 술과 고기를 보내고 특별히 연역을 오래 면제하였으며 또 경술(庚戌) 합방 후에 왜적이 우로(優老) 예로 주육을 궤송하니 이에 팔을 뽐내며 그릇을 던져 가로되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오랑캐의 주는 것을 받겠는가. 그 심부름꾼이 또 낫이 빨개지며 가 버렸다. 정사(丁巳)년 三월 十一일에 춘추 八十七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합봉하였다. 오홈다 우리 조비의 효열은 스스로 고을의 펭론이 있으니 소자가 어찌 감히 보태여 기술하겠는가. 그 어버이 섬김을 보면 여러해 시탕하며 약을 맛보고 똥을 맛보아 뜻과 몸을 함께 봉양하고 군자를 섬길 때는 처음 꿩을 얻어 효과를 보고 마침내는 북두에 빌고 대신을 원하였으니 가히 옛적 어진 부인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르겠다. 그 아들 가르친 법과 물이 친뜻은 가히 전가 위감이라 하겠고 돌아보건대 이제 세상 등급이 날마다 내리고 사람과 짐승의 구별이 없어 우에 유사의 포양이 없고 아래 실상을 기록한 문자가 없으니 후일 자손이 비록 우리 조비사행을 고증코저 하나 어찌 가히 얻겠는가. 이로써 참월함을 헤아리지 않고 대략 가정에서 듣고 본 것을 기술해야 세상에 글 짓는 자를 기다림. 불초손 두현 기(不肖孫 斗鉉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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